중립이라는 이름의 고립

보통 중립이라는 단어는 ‘편을 들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단어만 놓고 보면 마치 가장 합리적이고 균형 잡힌 태도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저는 특히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혹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기계적으로 중립을 남발하는 태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중립은 지혜가 아니라 방치에 가깝고, 때로는 무책임이라는 다른 이름을 가집니다.

저에게 중립을 취하는 사람에게는 저 역시 중립을 취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태도가 반복될수록 결국 스스로 고립을 자초한다는 데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명확히 손을 내밀지 않는 사람은, 정작 자신이 손이 필요할 때에도 잡아 줄 손을 찾기 어렵습니다.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다는 말은 때로 지혜지만, 동시에 아무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중립이 필요한 순간

물론 모든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입장을 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태가 명확히 파악되지 않을 때, 잠시 중립을 유지하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필요한 일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제한된 정보 속에서 판단하고, 불확실성과 함께 살아가니까요. 다만 기억해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중립은 영원한 주소가 아니라 임시 거처라는 점입니다. 어느 시점에는 반드시 판단을 내리고 입장을 정해야 합니다. 계속 머무르는 중립은 결국 현실로부터의 퇴거, 책임으로부터의 후퇴가 되기 쉽습니다.


오래전의 한 사건이 남긴 질문

오래전 연예인 예원 님이 겪었던 사건을 떠올립니다. 당시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고, 사건의 흐름을 비교적 온전히 담은 영상이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원 님이 다소 억울한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 배우 A 님이 겨울 바다에 직접 잠수하는 하드코어한 장면을 소화한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었지만, 만약 형평이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면 그것은 제작진에게 조정을 요청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같은 출연진에게 직접적으로 형평성을 요구하며 압박하는 방식은, 적어도 제가 보기엔 바람직하지 않았습니다.

겨울 바다에 장비를 착용하고 잠수한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고된 일입니다. 수영에 능한 사람에게도 쉽지 않고, 잠수 경험이 없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남자인 저 역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일입니다. 일 년에 한두 번 물놀이를 하는 정도라면, 그 바다 속으로 들어가라는 요구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당연합니다.


인간 본능의 세 단계: 정지–회피–투쟁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인간은 보통 정지–회피–투쟁의 본능적 단계를 거칩니다. 그 사건에서도 저는 예원 님이 실제로 이런 과정을 밟았다고 느꼈습니다. 처음 그녀는 회피를 시도했습니다.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신호를 여러 차례 보냈지요. 그러나 상대가 계속해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밀어붙이자, 회피는 실패했고 생존 본능은 결국 ‘투쟁’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거친 표현이 튀어나온 것은,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 가진 한계의 흔적이자 본능의 반응이었을지 모릅니다.

저는 그래서 사건을 평가할 때 단지 충돌의 장면만을 클로즈업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오히려 발단부터 충돌 직전까지의 맥락을 세심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그 사람을 투쟁본능을 드러내도록 몰고 갔는지 다행이 이 경우에는 모든 것이 촬영되어 있었습니다.


내 삶 속의 원칙

저 역시 삶의 자리에서 충돌을 피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한 가지 원칙을 따르려 합니다. 다툼이 벌어진 결과의 장면에 대해서는 먼저 사과합니다. 말이 거칠었다면 말에 대해, 표정이 날카로웠다면 표정에 대해, 상처를 남겼다면 그 상처에 대해 사과합니다. 동시에 그 이전의 발단과 과정에 대해서는 분명히 짚고 넘어갑니다.

  • 내가 느낀 부당함은 무엇이었는가?
  • 다툼을 피하기 위해 나는 어떤 시도를 했는가?
  • 지금 이 자리에서 나의 입장은 무엇인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답하다 보면, 때로는 오해가 풀리기도 하고, 때로는 끝내 어긋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삶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모두 제한된 시야와 불완전한 언어를 가진 채 서로를 통과해 나갑니다.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을 다투는 승패가 아니라, 어떻게 그 자리에 도달했는지를 성실히 돌아보는 일입니다.


중립이 부르는 고립

‘중립’은 듣기에 참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습관처럼 반복되는 중립은 종종 고립을 부릅니다. 아무에게도 다가서지 않는 태도는 결국 누구도 내 곁에 머물게 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누군가의 책임 있는 선택으로 굴러갑니다. 위험을 나누고 책임을 나누며, 편에 선다는 건 누군가와 등을 맞대고 서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결심이 없으면 관계는 느슨해지고, 공동체는 비어갑니다.

하루하루가 전쟁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마감은 겹치고, 사람 사이에는 미세한 균열이 자주 생깁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앞에서, 우리는 쉽게 무감각한 중립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그때일수록 저는 제 마음이 어디를 향하는지, 무엇을 위해 침묵하고 무엇을 위해 말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침묵이 지혜가 되는 순간도 있지만, 침묵이 방조가 되는 순간도 있으니까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래서 저는 범사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고자 합니다. 기도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는 다른 방식입니다. 제 욕망과 두려움이 만든 안개를 걷어내고, 책임 있게 선택할 힘을 청하는 일입니다. 중립을 무기로 삼기보다, 상황을 똑바로 바라보고 제 목소리를 내되, 그 목소리가 교만으로 흐르지 않도록 마음을 낮추는 일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불확실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불확실 속에서 작은 확실들을 만들어 갑니다. 가끔은 중립을 벗어나 한 걸음 내딛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발걸음이 비록 작고 서툴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내 삶을 지켜내는 울림이 됩니다. 저는 오늘도 그렇게 믿음과 두려움 사이에서, 중립이라는 임시 거처를 떠나, 책임의 자리로 천천히 발을 옮깁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완벽한 판단이 아니라 성실한 과정입니다. 발단에서부터 충돌에 이르기까지의 흐름을 성실히 살피고, 내 몫의 책임을 감당하려는 의지 말입니다. 그 의지가 있을 때, 비로소 중립은 방패가 아니라 다리를, 고립이 아니라 연결을 향해 변모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조금씩 배웁니다. 언제는 머물고, 언제는 나서야 하는지. 그 배움이 쌓여 우리의 내일을 단단하게 만들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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