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행파 유식학파 입문 무착과 세친의 생애 해탈

유가행파(유식학파)의 기원과 현대 ‘미용요가’에 대한 단상

유가행파는 유식학파 혹은 유가행유식학파로도 불리며, 중관학파(中觀學派)와 더불어 대승불교의 양대학파를 형성합니다.

요가하시던 분들이 만들었다고 해도 되고 실천수행을 하시던 분들이 만들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은 표현입니다.

다만 요즘의 요가는 대부분 미용요가이고 보는 것이 없고 아는 것도 없이 쫄쫄이만 입고 입에 발린 말을 하는데 여성성을 드러내는 말을 제외하면 아직 인상깊은 분은 보지 못햇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면 사랑을 설명하지 못하고 하나라고 하면 왜 하나인지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좀 아쉽죠.

다만 그 미용요가도 충분한 의미가 있습니다.

쫄쫄이만 입지않고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저도 정말 배우고 싶습니다.


유식학의 거두: 무착(Asaṅga)과 세친(Vasubandhu)

어떠하든지 유식학은 무착과 세친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아래에서 무착과 세친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유식사상은 무착과 세친(Vasubandhu)에 의해 『유가사지론』과소의경전인 『해심밀경(Saṃdhinirmocanasūtra)』을 근거로 하여 체계화되었다고 전하여 집니다.

무착은 인도의 대승불교 유식파의 대학자입니다.

생몰연대 미상이지만 4~5세기경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산스크리트명 아상가(Asaṅga)라는 이름이구요 한역이라고 합니다.

이 한역이라는 것은 다른 문자로 된 문헌을 한자로 번역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고대에 불교의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의 문자로 이루어진경전을 한자로 번역한 것을 지칭할 때 쓰인다고 합니다.

가령 옛날에 Z건담에서 나오는 전함의 이름이 아가마 였죠.

산크리스트어로는 전승 이라고 하고 우리가 아함부경전이라 할 때 그 아함이 바로 한역입니다만 무착과 아상가는 참 차이가 크네요.

제가 잘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서북 인도의 간다라국(현대의 파키스탄, 페샤와르 지방)에서 브라만의 자식으로서 태어났고 합니다.

브라만이면 크샤트리아의 윗 계급이니까 대표적인 금수저 였겠네요.

처음에 부파(소승)불교의 화지부(일설에는 설일체유부)에서 출가해서, 명상에 의거한 욕망으로부터의 해탈법을 습득했다고 합니다.


해탈(解脫)의 정의: 아집에서의 해방과 지혜의 수도꼭지

그런데 여기서 해탈이라는 말이 나왔죠.

바로 이 해탈이라는 말의 언어적 정의를 보지 않고 불교의 이야기를 계속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해탈이라는 말은 인간의 근본적 아집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인도사상에서 불교는 이것을 종교와 인생의 궁극 목적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간단히 정의하면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라고 간단히 정의할 수 있습니다.

즉 범부는 탐욕·분노·어리석음 등의 번뇌 또는 과거의 업(業)에 속박되어 있으며, 이로부터의 해방이 곧 구원이라고 합니다.

간단히 그리고 과격한 표현을 쓰면 때에 찌든 옷을 빨면 깨끗해지니 그 옷 입고 상큼해지자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해방은 다르게 표현하면 오음이 녹는다고 표현을 하기도 하며 이것은 지혜와 자비로 확장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에서 하겠습니다.

구원이 타율적으로 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지혜, 즉 반야(般若)를 증득(證得)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데 특징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 주장의 해당 종파의 결론이지요. 곁가지로 이야기하면 신이란 대명사일 뿐이여서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신이 지혜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걸 비로자나불 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신의 전모를 알 수 없지만 신의 두가지 큰 특징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지혜와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도 지혜와 사랑이 없이는 해탈은 불가능합니다.

욕망을 물에 비유하면 지혜는 여러분 싱크대 위의 수도같은 것입니다.

수도꼭지로 열고 닫을 수도 있고 물을 써서 설거지도 할 수 있고 라면도 끓일 수 있습니다.

쉽죠?

결국 번뇌의 속박을 떠나 삼계를 탈각하여 무애자재의 깨달음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번뇌의 속박이란 말은 번뇌로 불편해지거나 부자유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이고 무애자재는 불편함이 없고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주재성을 말합니다.

어려운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위의 싱크대의 수도를 생각하신다면 좀더 쉽게 이해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 비움을 중요시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기존의 물을 내려버리지 않으면 새물을 담을 공간이 없어지는 것이죠.

여기서 물은 욕망이라는 것이라고 위에서 말했습니다.

기존의 욕망을 가지고 있으면 새로운 욕망이 들어찰 수도 없습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