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의 대패(大敗), 자유시 참변으로 이어진 비극: 정신적 결여가 낳은 독립운동의 뼈아픈 기록

‘주인이 곧 우리’라는 선언, 그러나 전쟁 수행 능력의 부재

저는 글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 청산리 전투부터 시작해서 자유시 참변을 이야기하려면 역사가 주는 막막함을 견디는 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세계사적으로는 1914년에 시작해 1918년에 끝난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주인의식의 발현: 3.1 운동과 후천개벽의 시작

1919년 3.1운동이 발생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일대 사건입니다.

비록 단재 신채호 선생의 혹평을 들었을지라도, 바로 이 지점이 저는 우리 민족에 있어서는 후천개벽의 시작이었다고 봅니다.

우리의 주인이 바로 우리라는 것을 선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는 백성의 주인은 대한제국 고종이었을 것이고, 나중에는 일왕의 소유물이었습니다.

이것이 소위 그 당시의 ‘제국’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주인이 되는 선언이 비로서 인간에게 왕이 있던 오랜 시대에서 소유권의 역전이 일어났기 때문에 후천개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일본에서 제국 시대를 찬미하는 애니를 보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주인이 자신일 수 없는 시대를 찬미하다니 뇌가 어떻게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무장투쟁의 등장과 청산리 전투의 본질

어쨌거나 이 3.1운동이 무력 진압을 당하면서 비폭력 운동은 사실상 끝이 나고, 만주 각지에서 무장 독립군이 등장합니다.

홍범도가 자신이 이끌던 의병을 중심으로 결성한 대한독립군은 함경남도 갑산과 혜산으로 진공 작전을 펼쳐 독립군 무장 항쟁이 활발해지는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또한, 3.1운동이 있던 해 12월, 서일을 중심으로 대종교도들이 만들었던 중광단을 모태로 북로군정서가 결성되었습니다.

3.1운동 다음 해인 1920년, 여러 독립운동 단체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가 결성되었고, 1920년 6월 7일 봉오동에서 매복 전투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문제는 이것이 사실상 게릴라 전술에 의한 단 한 개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고, 전쟁을 이길 어떤 힘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승리했다는 군대는 거점을 버리고 일본의 관동군을 피해서 장백산맥의 산악지대로 피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으로 일본군이 15,000명에 이르는 대부대로 공격해 오게 되는데, 이 전투가 바로 청산리 전투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분명히 대첩이라 불릴 정도의 승리를 거두었는데, 다시 쫓겨서 러시아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겼는데 지키지를 못하고 도망간다.

사실 이해가 잘 안 가는 대목입니다.

뿐만 아니라 보급을 가능하게 했던 마을들까지 일본에게 초토화를 당하게 됩니다.

이걸 승리라고, 대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청산리 대첩이 아니라 대패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전투에선 이기고, 사실 이긴 것도 아니고 적의 공세를 한 번 견딘 것이죠.

전쟁은 분명 패한 것입니다.

저는 자주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결국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남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이걸 비판없이 수용하게 된다면 일종의 세뇌가 됩니다.

때문에 논리는, 즉 생각하는 힘은 세뇌를 이겨낼 수 있다는 평범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군대가 사람들을 지키지 않는 것은 곧 인적, 물적 보급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일꾼 다 날리고 미네랄 없이 게임이 가능한가요?

구한말은 대한제국도 독립군도 결국 뭔가가 정신적으로 결여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생존을 위한 위험한 이동

어쨌거나 독립군은 크게 두 가지 계열로 나뉘게 됩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의 본질적 차이

주로 서간도와 북간도 지방의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한인 무장 독립군을 지칭하는 민족주의 계열은 사상과 종교는 다양했습니다.

대종교, 천도교,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 다양했지만, 민족의 해방이라는 기치 아래 모인 사람들로 비교적 단합이 잘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공통점은 신을 믿는다는 것이고, 혹은 신을 믿지 않더라도 인간이 물질 그 이상의 무언가가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사회주의 계열은 유물론에 사상적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죠.

인간을 물질로 대하는 사람들은 결국 대상의 수단화와 자신의 욕망이 대상을 향한 제한 없는 투사로 귀결됩니다.

물론 자신이 힘이 없을 때는 이것이 크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힘을 갖게 된다면 본색을 드러내겠죠.

그래서 저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은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것이지 민족의 해방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민족의 해방은 민족의 해방이기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는 북한, 중국, 베트남입니다.

러시아 자유시로의 피신과 주도권 다툼

청산리 전투 이후 독립군은 북쪽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 지역인 흑룡강성 미산시에 모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게 됩니다.

한인 마을이 초토화되고 도망간 대한독립군단의 보급은 대단히 어려워집니다.

당시 러시아는 내전 중이었고, 독립군은 볼셰비키 중심의 적군과 협조하여 일본군 및 백군을 격퇴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의 습격으로 연해주의 한인 무장 부대는 근거지를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습격을 막아야 이긴 것이지, 이 습격을 못 막았다는 것은 전쟁에 진 것입니다.

저는 이런 식의 역사적 기술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이런 습격을 하려던 일본군의 주력을 먼저 치던지, 공격해오는 적을 매복해서 막아내든지 해야 하는데, 지금 보면 일본놈을 건드리는 놈이 따로 있고 일본놈에 희생당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격입니다.

보급은 필요하지만 보급을 제공하는 사람을 지키지 않는다는 신박한 생각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아무튼 이들은 패배 후 극동공화국의 자유시로 향합니다.

그곳에는 극동공화국 소속 오하묵의 자유대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북로군정서의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들을 믿을 수 없으므로 다시 간도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며 자유시 합류를 반대했다고 합니다.

북로군정서가 원래 대종교도들이 주축인 곳이고, 공산주의라는 독특한 이질감과 황당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저도 입장을 바꿔서 생각한다면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못 믿을 것 같습니다.


자유시 참변의 비극

1921년 1월부터 3월에 걸쳐 한인 무장 부대들은 자유시에 집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입니다.

무장 세력에게 공짜 밥을 먹여줄 사람은 당연히 없을 것입니다.

무장해제 요구와 독립군의 와해

적군은 대한독립군에게 공산당을 위해 싸워달라고 요구하고, 대한독립군이 이를 거절하게 됩니다.

이에 적군은 대한독립군을 2중, 3중으로 포위하고 무장해제를 시켜버렸습니다.

그러나 김좌진은 이를 미리 알게 되었고, 부하를 거느리고 극비리에 이만이라는 지역에서 다시 만주의 간도 지방으로 돌아가 병력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아쉬운 것은, 대한독립군단이 자치를 보장받으려 했다는 것은 드디어 뭔가를 알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보호하고 안전히 생산 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해야만 보급은 이루어지고 무장 조직은 존립할 수 있다는 기초 상식을 터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몰랐던 혹은 잊었던 조선은 망했습니다.

자유시에 모인 한인 무장 군대는 민족주의 계열의 대한독립군단과 공산주의 계열의 무장 세력이 있었습니다.

주도권은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 계열의 한인 무장 부대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통수권을 두고 상하이파이르쿠츠크파로 나뉘어 다툼을 벌였고, 보급 문제로 코가 꿰인 한인 독립군은 두 파에 나뉘어 배치되었습니다.

주도권을 잡은 이르쿠츠크파가 상하이파에 무장해제를 단행하면서, 여기에 포함된 한인 독립군도 무장해제를 당하게 됩니다.

이 무장해제를 무력으로 실행함으로서 독립군은 270여 명이 사살되고 31명이 익사했으며, 250명은 행방불명, 970명은 포로가 되어 볼셰비키 혁명군으로 편입되었다고 합니다.

흔히 자유시 참변은 공산주의 파벌의 권력 다툼에 대한독립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은 참변이었다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자유시 참변을 조사하면 이 시기가 지금처럼 이순신 장군이 민족의 성웅으로 취급받던 시기는 아니었다고 추측합니다.

만약 그랬다면 보급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백성의 소중함을 분명히 알았을 테니까요.

자유시 참변

어쨌거나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되었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던 서일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많은 독립군이 사망하자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 두 달 후 밀산에서 스스로 자결했다고 합니다.

단학계에서는 단정히 앉아 숨을 스스로 끊고 돌아가셨다고 전해집니다.

이게 문학적 표현이 아니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데, 이런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좌탈입망이라는 것이고, 이 정도면 고수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고 이루긴 힘들지만 제 목표이기도 합니다.

자유시 참변 이후 민족주의 독립군 거의 대부분이 공산주의인 이르쿠츠크파 및 상해파에 등을 돌렸다고 합니다.

특히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는 적기단도 적대시하였다고 합니다.

뭐 여기까지 읽으면 아주 당연한 일이 될 수밖에는 없습니다.

결론은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일한 사람민족의 해방을 위해 싸운 독립군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비유로 설명하면 ‘봉사’라는 단어를 우리가 머릿속에서 떠올렸을 때 보통사람이 생각하는 봉사와 우리나라 개신교 교회에서 봉사라고 말하는 것이 다른데, 개신교 교회에서는 최고의 봉사를 전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하러 가서 봉사했다고 말하는 것이고, 보통사람은 봉사를 내 시간과 노력을 남에게 나누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양자에는 실은 건널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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