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굴리말라의 이야기에 리뷰를 시작하겠습니다. 일단 매우 짧은 이야기 입니다.
앙굴리말라는 열두살때부터 따까실라에게 교육을 받았는데 머리가 좋고 명석해서 스승이 가장 총애하는 제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오해가 생겨서 스승이 그에게 분노하게 되어 거짓으로 말합니다.
사람 100명을 죽여서 손가락 100개로 목걸이를 만들면 도를 얻는다고 속입니다.
그래서 99 명을 살해하고 100명 째 석가모니를 만나게 됩니다.
무지와 분노가 만들어낸 비극, 그리고 석가모니와의 조우
그런데 상황을 잘 생각해보면 100명을 죽여야 도를 얻는다고 뻥치는 스승이나 죽이란다고 99명을 죽인 소시오패스 제자나 또 그 제자를 머리가 좋고 명석하다고 표현한 경이나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요상합니다.
하여간 이런 앙굴리말라가 석가모니를 만나서 개과천선하고 제자가 됩니다.
그러던 어느날 산고로 고통받는 산모를 만나게 되고 산모는 자신의 고통을 덜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합니다.
이에 앙굴리말라는 석가모니에게 급히 달려가서 어떻게 할지를 몰라 스승에게 묻자 스승은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단 하나의 생명도 손상한 일이 없으니 그 공덕으로 산모는 고통에서 벗어나서 편안하게 해산하라.
이렇게 말하라고 하자 99 명을 죽인 앙굴리말라는 당연히 이 말이 말이 안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석가모니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너 앙굴리말라는 여래의 가문의 태어난 이후로 단 하나의 생명도 해치는 일이 없지 않느냐?
여래의 가문과 진실한 언어의 힘
이 말에 앙굴리말라는 어떤 깨달음을 얻고 임산부에게 급히 달려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래의 가문에 태어난 이후로 생명을 단 하나라도 손상한 일이 없으니 산모는 이 공덕으로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서 편안하게 생명을 낳으라.
그 순간에 산모는 고통을 덜고 무사히 아이를 낳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앙굴리말라는 자신이 얻은 깨달음에 대한 확신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앙굴리말라가 산모에게 전한 말이 불교 진언의 시작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 진언이 진실한 언어 라는 뜻으로 해석을 한다면 저도 이 주장이 충분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세월이 흘러서 앙굴리말라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돌을 던지게 되고 그 돌에 맞아 죽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추측을 해 보건데 중세 유럽의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이 돌을 던질 사람들은 돌을 맞을 사람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돌을 맞을 사람도 돌을 던질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있다는 것을 알고 가는 것입니다.
앙굴리말라의 깨달음과 확신은 죽음 앞에서도 고수해야 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앙굴리말라 경의 상징성과 인간사의 모순
어떤 이들은 대승불교를 상징불교라고 말하는데 대승경전 만이 아니라 이 아함부의 경전 안에 있는 앙굴리말라의 경도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과장되고 기이한 배경과 계기를 깔고 나오는 것은 드라마적인 장치이고 상징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앙굴리말라의 경을 상징으로 해석하면 처음 이야기의 시작에서 스승의 오해는 무지를 나타내고 무지는 어리석음으로 어리석음은 분노로 이어지고 그 끝은 앙굴리말라가 도를 얻겠다고 아흔 아홉명을 죽이는 사태로 발전해 나갑니다.
사실 이것이 바로 인간사 입니다. 앙굴리말라가 100명을 죽여서 도를 얻는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선 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만 선 이었고 조금만 시야를 확대하면 그에게조차 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거나 우리가 살아가는 요즘이나 별 차이가 없어요.
우리도 살기 위해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매일 무언가를 죽입니다.
내가 직접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단언컨대 그건 변명일 뿐 이죠.
우주대법계는 결코 인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만을 위한 선은 조금만 시야를 확대하면 법계에서는 선이 아닐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또한 겨우 이런 이야기 정도에 놀라고 웅성 대고 조용히 하라면서 사람들의 생각을 막아서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걸 보면 조금 안타깝지요. 어떤게 무슨 일인지 알아 보려는 시도 자체를 봉쇄하려고 하는걸 보면 늘 좀 안타깝습니다.
앙굴리말라는 이 죽고 죽이는 관계의 대명사 입니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 탐 진 치 삼독의 해악이 난무하는 세상의 질서 그 대표죠.
그 질서 앞에서 산모가 고통을 호소한다 는 것은 실은 생명이 탄생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존재가 싫습니다 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이러한 모순 속에서 산모는 큰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두 개의 질서와 실질적인 깨달음
거기서 석가모니는 여래의 가문은 그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여래의 세상엔 다른 질서가 있고 그것은 생명이 존재를 거부하지 않고 태어남을 축복하는 것을 괜찮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진실한 언어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준 것입니다.
앙굴리말라가 이야기를 건넨 후 산모가 통증을 덜고 무사히 출산을 했다는 것은 생명이 존재를 긍정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 경험 속에서 앙굴리말라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깨달음과 확신을 얻었을 것입니다.
왜 실질적이고 구체적이냐면 깨달음이라는 것이 실제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이제 화두잡다가 빵 터져서 전부 다 알거나 아니면 전무이거나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터지는 수준이 다를지언정 결코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또 레몬을 씹고 그 신맛을 참을 수 없는 것처럼 어떤 깨달음이라는 것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막 뜬구름을 잡기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온건하고 진실한 언어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법
그래서 자신의 깨달음에 대한 확신은 삶에서 미덕의 방패가 되어 주고 설사 돌에 맞아 죽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그런 삶의 방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진실한 언어를 써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생각입니다.
예전에는 추억을 거슬러 올라갈 때 10년 전 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와 벌써 이렇게 됐구나 하는 그런 느낌을 갖게 됐지만 지금은 뭐 많이 거슬러 올라가면 삼십년을 거슬러 올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 할 수 있는게 일반 사람도 충분히 온건한 언어로써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일반인도 천지 공사가 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만 이건 나가도 너무 나간 것이겠죠.
진실한 언어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절대 허망하지 않다 라고 저는 가끔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의 원전은 사실 강증산 선생이죠. 물론 저는 민족 종교의 큰 발자취를 남기신 그런 분과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죠.
약간의 재능과 약간의 소양이 있는 그냥 장삼이사 일뿐이니 언제 어디서 어떻게 같은 것은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 둘 중에 하나만 택하라면 결단코 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살리는 도리와 죽이는 도리 이 두 질서를 모두 보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이 두 질서가 얽혀 돌아가는 세상의 모순에 고민하게 됩니다.
그것은 세상의 불완전성 입니다.
첨삭과 변형을 넘어선 주체적 사유
그래서 동학의 이천식천이나 서양의 영지주의 데미우루고스 크게는 불교의 극락 정토까지 그런 모순 속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은 왜 이러며 우리는 또 왜 이런 모습일까? 하는 의문과 탄식을 저 역시도 늘 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고대 인도의 정신 세계는존재가 개체성을 버리고 참나로 돌아가서 윤회의 완전한 종식을 궁극의 목표로 삼는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생명에게 존재의 긍정을 얘기하는 것이니 완전히 반대의 이야기가 됩니다.
산모의 무통과 편안한 출산은 생명에게 존재하여라. 축복하고 환영한다 라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열반경도 좀 의심을 합니다.
왜냐하면 팔리어로 된 모든 경전를 포함해서 어떠한 경전이든 인도 문화와 지배계급의 사상이 영향을 미쳐서 수많은 첨삭과 변형이 당연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마리로 받아들고 맹신하지 말라는 것이고 이것은 살불살조의 전통있는 한국불교가 누릴 수 있는 큰 장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담이지만 저는 어릴 때 어른들과 형들에게 늘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서 자랐고 나이 들어서는 동생들과 젊은이들에게 늘 물어보면서 살고 있습니다.
제가 노인이 될 때쯤에는 사람이 아니라 ai 에게 물으면서 지내게 될 지도 모를 것 같습니다.
어쩌면 양자컴퓨터도 나온 마당에 이미 인간을 초월하는 ai 가 나왔을 수도 있다는 그런 망상을 해봅니다.
만약 그런 ai 가 있다면 ai 는 이런 공부의 맛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이런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할지 대단히 궁금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유튜브에 올리는 많은 것들이 만약에 이런 초월적인 ai 가 우리를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에 대한 기준을 세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항상 그런 망상같은걸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