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의 숙흥야매잠도 해설: 현대인을 위한 아침·저녁 깨어있음 수행법

숙흥야매잠도를 시작하겠습니다. 소개글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순환하는 것을 오직 마음만은 볼 수 있으므로 고요할 때는 이 마음을 잘 보존하고 움직일 때는 잘 관찰해서 마음이 둘 또는 셋으로 나뉘어서는 안됩니다.

글을 읽다가 틈이 나면 간혹 휴식을 취하고 정신을 활짝 펴고 성정을 아름답게 길러야 합니다.

날이 저물어 사람이 피곤해지면 나쁜 기운이 들어 오기 쉬우므로 몸과 마음을 잘 가다듬어 정신을 맑게 이끌어야 합니다.


일과 일 사이의 15분, 생활 속에서 ‘몰라’로 리셋하는 공부

실생활로 설명을 하면 저 같은 경우에는 요즘 일 끝나고 돌아오면 에어컨 키고 옷 벗고 일단 쓰러지죠.

피곤하니까요. 그래서 너무 피곤하면 바로 잡니다. 어쩔 수 없죠.

만약 버틸만 해서 일어나 앉게 되면 한 15분 정도는 몰라 를 하다가 씻으러 갑니다.

그 후에는 이제 또 씻고 나와서 15분 정도 몰라를 하다가 tv 를 보거나 방청소를 합니다.

또 공부를 하지요. 그래서 이렇게 하나의 일과 일 사이의 15분정도 몰라를 항상 하는 방식입니다.

그런 식으로 생활 속에서 공부들이 짬짬이 이루어져서 리셋을 하는 거죠.

그리고 다시 소개글로 넘어가 보면 숙흥야매잠도는 진백이 글을 쓰고 퇴계가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퇴계는 경제잠도를 보고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숙흥야매 라는 말은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 늦게 잔다 라는 뜻인데 그 만큼의 시간을 아껴서 학문에 전념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제 학문은 공부하고도 같고 수행하고도 같은 말이죠. 간단히 말하면 부지런한 하루하루가 모여서 1년이 되고 삶을 채워 나가는 것이죠.

사실 당연한 일이고 역시 또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주목할 부분은 두번째 신흥 영역에서 허 명 정 일 이란 말이 있는데 마음이 텅 빈 듯 하면서도 밝고 고요하고 한결같이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게 몰라 로 깨어나면 정확하게 이렇게 됩니다. 어려운 거 아닌 거구요.

그 다음에 이제 굳이 여기서 한마디 하자면 표현에 있어서 이제 깨어있음이 있고 깨어있음이 한결같다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깨어있음의 흐름(Flow)에 대한 의문과 숙흥야매잠도의 구성

근데 이제 깨어있음이 흐른다 는 표현은 사실 이게 좀 불분명한 표현이에요.

왜 이런 표현을 쓰는지 사실 꽤 오랫동안 생각을 했는데 역시 모르겠어요.

깨어있음이 굳이 flow의 개념에서 설명할 이유나 근거가 사실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주장은 어디 책을 보고 인용한건지 본인 생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불분명한 표현들을 사용하는게 결국에는 득될게 없어요.

뭐 제 일은 아닙니다. 제가 간섭할 일도 아니고 솔직히 듣고 감상하고 생각해 본 것만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숙흥야매잠도는 7개의 영역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영역은 숙오인데 일찍 잠에서 깨어난다는 뜻입니다.

닭이 울어서 잠에서 깨어나면 생각이 차츰 일어나 되니 그 사이에 조용히 마음을 정돈해야 합니다.

혹은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고 혹은 새로 깨달은 것을 모아서 차례와 조리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이제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변성의식에서 현재의식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하지요.

이렇게 현재의식이 리셋되어 처음으로 시작할 때 축원이나 다짐, 발원, 확언, 단언 이렇게 이런 말을 우리의 무의식에 각인시키는 것에 가장 좋은 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 광덕 스님은 매일 아침 일어나서 “나는 불자다. 나는 무한 창조력의 소유자다.”

이런 자기선언을 아침에 하도록 권유하셨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체험을 생각해보면 심하게 피곤해서 이제 자고 일어나면 사람이 멍해져서, 해야 할 것들이 잘 생각이 안나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결심같은 것도 흐릿해지기도 하죠.

이 때 일어나서 해야 할 일을 되새기고 하는 것이 저녁에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있었습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자기 전과 자고난 후 2번을 행하는 것이 더욱 좋겠지요.


현실의 제약을 넘어 자신만의 여정과 다양성을 존중하기

다음으로 이제 우리 하루 일과의 시작은 정말 바쁩니다. 예 숨가쁘게 돌아가지요.

만약에 지금 이걸 보시는 분이 숙오의 내용을 실천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일단 가정을 해볼게요.

그래서 이제 숙오의 내용을 실천할 수 없으므로 공부 자체를 포기해야 할까요?

절대 그렇지 않죠. 이러면 이런 대로 저러면 저런 대로 방법을 찾고 상황에 맞는 해법을 찾아 나갈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다양한 방법들은 그 나름대로 가치가 항상 있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자신과 인연이 있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므로 다른 다양한 방법을 자신의 가벼운 알음알이로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다양성을 존중하시고 모든 것은 자기 안에 있으므로 또 중요한 것은 이 말이 결코 문학적인 수사가 아니라는 것이죠.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만큼 기준과 가치를 세우고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스스로의 여정을 떠날 수 있는 최소한의 준비는 끝난 것입니다.

이때 알아야 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요. 그것은 세상에 다 아는 사람은 없다 라고 하는 평범한 사실입니다.

하늘에서 연고없이 뚝 떨어지는 것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끊임없는 노력과 연구 축적 입니다.

이런 것들을 착각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조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무조건 ‘이것은 이런 것이다’ 라고 이렇게 추종적으로 따라가 봐야 본인 인생에 도움되는 경우가 별로 없죠.


신흥(晨興) 영역과 ‘몰라’를 통한 활성화 창 끄기

다음은 두번째 영역인 신흥 인데 새벽에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근본이 확립되었으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옷을 갖추어 입고 단정하게 앉아 몸을 가다듬습니다.

마음을 끌어 모으되 밝게 떠오르는 햇살처럼 해야 합니다.

몸은 엄숙하고 가지런하게 정돈하며 마음을 텅 빈 듯 하면서도 밝고 고요하게 한결같이 해야 합니다.

마음을 어떻게 끌어 모을까요? 만약에 전통적인 수행 방법의 하나인 대비주라면 열심히 외우면 됩니다.

이때 잡념이 사이 사이에 끼지 못하게 되도록 빨리 외우죠.

다만 외우는 것이 무리하게 빨리 감아서 뭉개져서 외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외우는 것을 내가 똑똑히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깨어나게 되죠.

이제 각성 상태가 유지되는 겁니다. 그러면 당연히 마음이 밝게 떠오르는 햇살같이 됩니다.

또 하나는 잠과는 또 다른 변성의식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오는 체험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생활과 생각이 정돈되어 행동으로 나오는 것이 현실 세계에서는 훨씬 더 큰 효용을 지닙니다.

이상하고 기이한 일에 마음을 뺏겨 봐야 별로 좋을 것이 없어요.

다음으로 대비주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주제로 삼고 있는 몰라 같은 거라면 어떨까요?

가령 이제 월요병이 발동한 월요일 아침에 출근 길을 가정해 볼게요.

지하철을 타고 출근지로 향하면서 몰라를 조용히 자신의 내면으로 던져 넣는 거죠.

늘 하는 말이지만 우리 의식을 지금 여러분이 쓰시는 컴퓨터의 모니터라 가정하면 가장 전면에 대두되는 것이 즉 지금의 모니터에 활성화 된 창 이라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몰라” 는 활성화 된 창을 끄는 것이죠. 이렇게 철학에서 말하는 것은 판단 중지가 우리에게 있어서 작동하는 것입니다.

월요일 아침에 짜증이 납니다. 그럼 마음속으로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이렇게 툭툭 던져 넣는 것이죠.

한번에 될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보통은 그 쓴 커피에 작은 스푼으로 설탕을 계속 떠서 넣는 것처럼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이제 현재 머리속에 가장 크게 대두 되었던 짜증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습니다.


오온을 내려놓고 신성의 힘으로 인간관계를 리셋하는 효용

그러면 다음 타자가 이제 어제 월요일에 출근 하려니 잠이 안와서 늦게 자서 생긴 피로와 멍함이 이렇게 몰려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또 이제 거기다 대고 모른다 라고 쌩까는 겁니다. 이렇게 다가오는 것에다가 전부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을 내려 놓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리셋되고 활짝 깨어나게 됩니다.

제가 이 몰라 를 하면서 가장 큰 효용이라고 느끼는 부분은 지내면서 인간관계에서 오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자신의 어떤 부분들을 구속하기도 하고 때로는 뭐 주눅이 들기도 하고 의기소침하게 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사람을 비겁하게 만들거나 어리석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 문제들이 리셋되고 깨어나면서 참나 혹은 신성의 힘을 받으면 때로는 작은 부분에서 또 때로는 큰 부분에서 의미있는 발전이 있게 됩니다.

전에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을 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거는 꼭 해봐야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개인적인 체험에 있어서 저는 앉기도 뭐 많이 앉았지만 때로는 그 과천 대공원에서 어머니들이 뺑뺑이 도는 경보 코스가 있죠.

거기서 왼발에 몰라 를 하면서 밤새도록 걸은 적도 많습니다.

또 지하철에서 몰라 연습을 하다가 무심코 7호선 종착역까지 가버린 적도 많이 있습니다.

이게 무엇을 말하냐 하면 최소한 이런 일에 이런 시간을 투자할 만큼의 분명한 효과가 제게는 있다는 것지요.

그래서 제게 있으니까 다른 사람에게도 있을 거라고 추측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독서와 관법(觀法), 일상과 유튜브에서 쓰이는 상상의 힘

다음으로 숙흥야매잠도의 세 번째 영역인 독서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책을 펴서 성인을 대하게 되면 공자께서 자리에 계시고 안회와 증자가 앞뒤 있을 것입니다.

성현께서 말씀하신 것을 친절하게 귀담아 듣고 제자들의 질문과 변론을 반복하고 참고해서 바르게 고쳐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데 지금 이것이 하나의 관법입니다. 관무량수경에 나오는 그 관이란 글자 바로 그 의미입니다.

아주 단순하고 거칠게 이야기하면 이제 없는데 있는 것처럼 한다는 뜻입니다.

예전에 예능프로인 아는 형님 86화에서 신체나이 테스트로 이제 균형잡기를 하는데 눈을 감고 양팔을 벌리고 한 발을 들고 이제 오래 버티기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당연히 어렵겠죠. 거기서 강호동씨가 갑자기 이렇게 말합니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상상의 사물을 만들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바로 그게 관법이죠.

저는 가끔 유재석씨나 강호동씨가 말을 하는 것을 듣다 보면 정말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관법은 현실세계에서도 굉장히 많이 쓰입니다.

유튜브를 만들 때에도 쓰입니다. 한번 상상해 볼까요?

먼저 주변환경을 조용히 만들고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이제 카메라를 돌리고 마치 사람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동감 있고 흥미를 끌 수 있도록 이야기를 스피디하게 진행합니다.

관법하고 하나도 차이가 없습니다. 홈쇼핑에서도 쓰이고 있구요.

마트에서 과일 파는 분들도 열심히 멘트를 날리고 계십니다.

이 관법을 잘하는 것이 유튜브같은 데 있어서 조회수나 혹은 홈쇼핑에 있어서 매출 같은걸 올릴 때 얼마나 많은 차이를 만드는 지는 경험이 있는 사람은 충분히 알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정말 큰 차이를 볼 수 있죠. 불교에서는 관무량수경이라는 정토 경전이 있는데 별칭을 16관경이라고도 하며 정식 명칭은 관극락국 무량수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경이라고 합니다.


관무량수경과 칭명염불, 그리고 수행에 얽힌 착각들

이 정식명칭을 살펴보면 관은 본다 와 상상한다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극락국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이라는 것이죠.

무량수불은 아미타 부처님 입니다. 극락국의 교주를 말하는 건데 법계에 주인이니 그 세계의 신을 말하는 거죠.

사람 안에서는 참나가 됩니다. 그 다음에 관세음보살은 자비 즉 사랑을 대표하고 대세지보살은 지혜 즉 지각을 대표 합니다.

이러면 인의 두 특징인 사랑과 지각이라는 것과 사실 같습니다. 해서 인이나 참나나 불성이나 신성은 모두 같은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또 관무량수경을 별칭인 16관경에 측면에서 보자면 가장 중요한 것은 맨 마지막의 16관법인데요.

이것은 바로 칭명염불(지명염불)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외우는 것이 송불이지 염불이 아니지 않느냐? 이렇게 말을 하는데 염해야 비로소 염불이다 라고 말을 하는데 이것은 정토문이 아니라 사실 성도문의 시각입니다.

가령 우리가 이런 걸 생각해 봐야 돼요. 화두선을 하는 사람은 염불을 사실 잘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행위는 어디까지나 화두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원하는 것은 화두선으로 인한 결과를 원하는 것이니까요.

믿음도 없고 관도 없는데 염불을 가르칠 수 있을까요? 답은 없습니다.

예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처음 시작시에 깨어있음 같은 것은 물론 동일합니다. 이건 아주 기초적인 거니까요.

제가 이제 실제로 염불을 하면서 알게 된 점은 이 나무아미타불 이란 행위가 있다는 것은 그 행위를 촉발시키는 기대가 있다는 것이고 그 기대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칭명염불은 관법입니다. 이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제 경험에 있어서는 이근과 안근에 대한 작용이 있었습니다.

이근이란 자성염불이라고 해서 다음에 가르쳐 주는 스님이 있는 카페가 있는데요.

자성염불은 일단 사실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이란 소리가 모기가 귀 가까이에서 왱 거리는 소리처럼 분명히 들립니다.

왱 그렇게 들린다는 게 아니라 소리가 아주 분명하게 들린다는거죠.

하지만 그 소리는 없는 소리이기 때문에 녹음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으로 안근에 작용할 때는 이제 눈앞에 부처님이 보이는 것이죠.

눈을 감아도 보이고 눈을 떠도 보입니다. 그래서 관법에 대한 생각을 전에 해본 적도 없던 때부터 나타나서 사실 이게 무엇인가 하는 고민도 많이 했던 적이 있습니다.

원래 소질이 있는 사람은 현상이 일찍 나타납니다.

근데 문제는 그 현상에 올바른 의미ကို 부여할 수 있는가? 그런 일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가?

그런 일인데 이거는 사실 그 현상이 나타나는 것과 또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걸 아셔야 되구요.

이제 여기까지 이야기를 해놓고 꼭 한가지를 말하고 싶은 것은 옛글이나 옛사람의 이야기를 절대적으로 믿지 말고 하나의 실마리 정도로 받아들이는 때가 있어야 합니다.

특히 이게 성도문에서 하는 불교 이야기인은 더욱 그렇습니다. 아주 쉬운 이야기죠

자기 전공이 아니면 잘 몰라요. 언젠가 정토삼부경을 리뷰할 때가 있으면 나올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뭘 배우든 염불을 전공하지 않는 사람에게 염불에 대한 질문을 했다면 이제 자신이 좀 크게 어둡다는 것을 자각하시고 반성을 하셔야 합니다.

호흡법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한테 호흡법을 물어봤다면 그것도 마찬가지란 것을 별도의 설명이 없어도 아실거라고 봅니다.

이렇게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고 공자님이든 부처님이든 바로 지금 눈앞에 현전하는 것을 반주삼매라고도 합니다.

물론 모두가 그렇듯이 안한지 오래되면 사라지죠. 이게 뭐 한번 나타나면 영구불변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불교 중에서도 정토문은 또 기독교와도 이렇게 많이 비교가 되곤 합니다.

정토문은 불교이고 불교는 기독교와 같진 않죠. 근데 어떻게 다르냐?

아미타불은 이제 협시보살로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있고 요게 지혜와 자비를 상징합니다.

참나의 가장 큰 두 특징인 것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인의 두 특징인 지각과 사랑이라는 것과 같습니다.

근데 이제 기독교에서는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고 또 구원으로 완성되어집니다.

근데 인간의 지혜는 따로 이야기 되는 부분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 뿐 오직 사랑 뿐 오직 구원 뿐 뭐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지만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설명같은 것은 좀 없어요.


석척(夕惕)과 겸숙야(兼晝夜), 저녁의 기운 정돈과 불면증 해소

다음으로 숙흥야매잠도의 6번째 영역인 석척에 대해서 인용해 보겠습니다.

석척은 저녁에도 항상 조심하고 정신과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날이 저물어 사람이 피곤해지면 나쁜 기운이 들어오기 쉬우므로 몸과 마음을 잘 가다듬어 정신을 맑게 이끌어야 합니다.

밤이 깊어 잠을 잘 때는 손발을 가지런히 모아 아무런 생각을 하지 말고 마음과 정신을 잠들게 해야 합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젊어서는 피곤해지면 나쁜 기운이 들어오기 쉽다는 이야기는 실감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제 나이가 들수록 몸의 상태는 점점 더 왔다 갔다 하고 예민해지게 됩니다.

또 도시의 밤과 산의 밤이 다르죠. 해가 지기 무섭게 기온이 뚝 떨어지고 찬기운이 엄습합니다.

아마 퇴계 선생은 매일 겪었던 일이었을 것입니다.

일곱번째 영역은 겸숙야인데 겸숙야를 마저 인용하고 같이 묶어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겸숙야는 낮부터 밤까지 자신의 정신과 기를 가다듬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밤의 기운으로 마음과 정신을 잘 기르면 정이 다시 원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항상 생각하고 마음에 두어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써야 합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잠을 잘 때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 의식이 변성의식 상태인 수면으로 넘어가는 것이죠.

생각이 있으면 당연히 수면으로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몰라하면서 생각을 내려 놓으면 저같은 경우에는 경증의 불면증 정도는 가볍게 해소가 되었습니다.

꼭 한번 해보시길 권해드리고 이 부분도 해본 사람은 사실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잘 쉬고 잘 자고 그래서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이야기이고 당연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장좌불와(長坐不臥) 수행의 존중과 기운(호흡)의 기초

그러나 소위 수행이라는 것을 하는 사람들은 의문의 한 단어가 의외로 머리속에 떠오를 수 있습니다.

어떤 단어냐 하면 장좌불와 입니다. 장좌불와는 긴 시간 앉아 있고 눕지 않는다 는 뜻이죠.

좌선을 하는데 앉아서 잠을 자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앉아서 잔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앉아서 자지 않고 화두참구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장좌불와로 유명하신 분은 가깝게는 성철스님이 계셨죠

저는 이 분이 공부한 것은 그대로 인정을 해 드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상업적으로 공부를 가르키는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 수준으로 끌어 내려야만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평생 수행한 걸 낮추고 그 사람의 어떤 말 중에 일부의 오류가 있다면 그것을 통해서도 전체의 사람을 폄하하는 쪽으로 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저는 가르치는 것을 생업으로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거든요.

가끔 이제 보통 사람이 행할 수 없는 수행을 하는 분들이 계시죠.

저도 감히 도전해 보지 못할 그런 수행들을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미지의 영역에서 얻은 것은 그 나름의 존중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부분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어떤 능력이나 권위에 묻혀 벙어리가 되는 것을 허락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거나 팔리어만 나타나면 이제 멘탈이 흔들리는 어설프신 불교인이나 같은 겁니다.

공부의 면에서는 아직 두 발로 걷지 못하는 아기와 같은 상태이죠.

그렇게 해서 자신을 좀 파악을 하고 흔들림 없는 데 까지는 자기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은 뭔가 하나의 물결이 올때마다 흔들리고 자신감을 잃게 되죠.

뭐가 뭔지도 잘 알 수 없어지구요.

이제 장좌불와 쪽에서는 그렇게 길고 오랜 상태로 잠을 자지 않는 것은 예외로 치고 예전에 광덕스님 같은 경우에도 호흡법을 익혀서 한 일주일 쯤은 잠 안자고 공부했다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운이 받쳐주면 가능한 일입니다.

화두를 들 때도 호흡이 단전에 내려오는 것을 익힌 뒤에 화두를 드는 사람이 있고 애초에 이런게 상관 없다는 사람도 있는데 이게 이제 기운에 기초를 닦고 화두를 드느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광덕 스님과 예전에 숭산 스님은 이 호흡법의 필요성을 인정하셨다 까지는 매우 확실한 이야기 이구요.

또한 저의 결론도 역시 그것입니다. 일단 호흡법에 기초를 닦고 그 다음에 좌선을 드는게 훨씬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경험을 말하면 대학교 방학 때 거의 전체 기간을 잠을 안자고 호흡법만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호흡법이 제법 수준이 좀 나아졌을 때 였죠. 이제 그러다 개강 후에 전체 기간이 한 석 달쯤 되었을 때 눈에서 경련이 일어나서 포기를 한 적이 있고요.

또 대비주를 하다가 몇 번 그런 경험이 있었는데 그리 최근은 아니지만 한 2, 3년 전에 대비주를 하다가기운이 크게 나서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아서그거 자체를 관찰하는 실험을 하다가 한 열흘 쯤 되니까 갑자기 몸이 완전히 창백해지고 차가워지면서 앓아 눕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생업에 종사할 때 였죠.

한 며칠 않아 누었었는데 중요한 것은 평범하지 않은 어떤 것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들이 우리의 보편성을 부정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하는 부분입니다.

솔직히 저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만 만약에 있다고 한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하는 생각도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9년을 잠을 안자고 좌선만 해야 얻을 수 있는 진리라면 단언코 저와는 관계없는 진리일 것입니다.

다만 자신의 경험 해보지 못한 이런 미지의 영역은 그대로 존중을 하시는게 좋습니다.

그러나 전부 아니면 전무에 양자택일 적인 사고는공부하는 이가 극복해야 할 초보적인 함정이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성학십도를 마치며: 인(仁)의 소명과 신이 인간에게 바라는 것

이것으로 성학십도를 마치며 총정리 삼아서 저의 견해를 밝히면 공문의 제자는 가장 먼저 인 을 찾습니다.

이 인은 인의예지로 분화 되기 전의 인 을 말합니다. 인의 두 가지 특징은 지각과 사랑이고 이는 불가에서 말하는 참나 와 동일합니다.

인간 생명의 근본은 우리의 숨이 성대를 통해 소리로 변환되어 자신을 표현 하듯이 무한한 신성이 자신의 표현을 위해 그 자신의 일부에게 마야 라는 하나의 막을 씌워서 개체성을 획득한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소명은 인간의 욕망의 체계에서 파악할 수 있는데 인간은 동일한 자극에 동일한 만족을 얻지 못하는 욕망의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명은 이런 욕망의 체계와 같이 정체되는 데 있지 않고 느끼고 경험하고 생각하고 표현하며 그것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새롭게 재규정하는 데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공유하고 서로 비추는데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바로 이것이 신이 인간에게 바라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자 이것으로 이야기를 마치며 긴 시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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