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도는 사서의 하나인 대학이라는 책을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권근이 그림으로 요약하여 정리한 것이라고 합니다.
유가에서 학문이나 수양은 다른 곳에 수행 수도 공부 이런 말과 같습니다.
물론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1. 양심이라는 미명과 참나의 오해
그래서 대학은 수기 치인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아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이끌어서 선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이라는 게 옳다 라는 의미 만이 아니라 좋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따라서 양심이란 미명하에 끊임없이 윤리나 도덕으로 자신과 타인을 단죄하는 것은 아주 좋지 못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주장하면 사람들의 공명을 얻기가 힘듭니다.
아름다운 말처럼 들리긴 하지만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거든요.
분명히 우리에겐 양심이 있죠.
요즘 예를 들면 저스티스 리그의 플래시는 저스티스 리그의 양심회로 역할을 한다고 해요.
그렇게 우리 안에는 양심 회로가 있어요.
분명히 있는데 그것은 부분을 지칭하는 것이지 우리 모두의 전체, 본성을 대표하는, 전체를 지탱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만냥 양심과 참나가 완벽하게 같은 의미로 치환된다면 양심이 답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참나가 답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표현되지 않죠. 그래서 이런걸 자기 마음대로 바꿔 봐야 좋지 못해요.
그렇게 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끌어낼 수가 없습니다.
2. 밸런스와 깨어있는 생각: 경(敬)의 시작
아까 윤리나 도덕으로 자신을 끊임없이 단죄하면 안좋다고 했는데 사실 정신적으로 매우 좋지 않은 짓입니다.
반대로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위태롭듯이 경험하고 돌아보지 않는 것도 위태롭습니다.
그래서 양자 간의 밸런스가 있어야 됩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걸 바로 깨어서 생각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작과 끝이 경인 것입니다.
수행은 일단 잘 깨어서 시선을 내면으로 돌리면 회광반조가 되고 밖으로 돌려 사물을 접하면 격물치지가 되는 겁니다.
격물치지와 팔정도의 괴리
실제로 격물치지를 하다보면 격물이 보통 언어로서 추상적인 이치를 파악하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실과 어긋나는 수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팔정도라 하면 아함부 경전에 정의된 팔정도와 격물로 파악한 팔정도는 같기도 하지만 다르기도 하다는 겁니다.
3. 삼강령과 봉우 권태훈 선생님의 해석
그리고 드디어 삼강령이 나왔습니다.
삼강령은 명명덕 신민 지어지선 그리고 팔조목은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이렇게 됩니다.
소설 단의 실존 주인공인 돌아가신 봉우 권태훈 선생님은 재명명덕 재신민 재지어지선을 재명명 덕재신 민재지어지선이라고 이렇게 푸셨습니다.
보통 책에는 자신의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고 지극한 선에 머문다. 이렇게 나오는데 봉우 선생님은 이걸 본래 밝았음을 밝히고 덕은 새로움에 있고 백성을 지극히 선에 머무르게 하는 데 있다고 이렇게 푸셨습니다.
공부하는 곳의 ‘정신의 구멍’ 난 사람들
저는 이 공부의 시작이 15살때 소설 단을 보고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 인생에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인데 그렇다고 인연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라서 대학 시절에 잠시 이렇게 스쳐가는 인연이였다고 말하기도 참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이유는 봉우 선생님이 못마땅 했던게 아니라 이런 공부를 한다는 곳에 가면 이렇게 늘 정신의 구멍이 숭숭 뚫렸다고 표현할 만한 사람들이 버티고 있어요.
그래서 공부를 해서 저렇게 될 것 같으면 절대 안할것 같은데 이런 마음을 먹게 만드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더구나 이 당시가 군대 갔다 오기 전에 대학생일 때니 왜 이런지에 대한 의문도 사실 풀 길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알죠.
어디든 그럴듯해 보이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것들입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다 모여 있죠.
그래서 오히려 좋고 가치 있는 곳일수록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4. 유가의 심법: 지지이후 유정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저는 요 삼강령을 자기 방식대로 푸신 봉우 선생님의 말씀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사실 백성을 새롭게 만들다 라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있게 푸는 사람들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그렇다면 이 해석은 틀렸다고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전제와 결론이 충분한 개연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부분은 우리가 흔히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에서 수신을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유가의 심법이 지지 이후 유정 정이후 능정 정이후 능안 안이후 능려 려이후능득 입니다.
우리말로 풀면 머물 곳을 안 다음에 방향을 정할 수가 있으며 방향을 정한 다음에 고요할 수 있고 고요해 진 다음에 평온할 수 있고 평온해 진 다음에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한 다음에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거는 일단 작은 일상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전체 수행의 경지를 말해 주기도 합니다. 이럴 때는 능득은 득도를 말하는 것이 되지요.
그래서 선도 수련의 있어서는 려단계에서 생리적인 변화가 오고 그 다음에 능득입니다.
남회근과 팔정도의 순환
저는 이 이야기를 봉우선생님에게 듣고 한 이십 년쯤 지난 뒤에 대만의 국사라는 남회근 선생님의 저서에서 다시 보게 되었는데요.
처음에는 어렸을 때 이 뜻을 이해하고 참 엄청 기뻐 했었는데 이십여년이 지난 후 남회근 선생님의 저서에서 읽고 나서는 뭐 또 다른 뜻이 있나? 하고 좀 갸우뚱 해졌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쉽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 심법이 팔정도처럼 자체 순환을 하면서 심화되고 또 확장되고 이렇기 때문입니다.
저는 보통 팔정도를 말하고 육바라밀을 말하는 경우가 없는데 그것은 팔정도가 해보니 더 말이 되기 때문이죠.
저는 육바라밀의 처음이 보시로 시작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십지의 초지가 환희지였던 것으로 보아서 육바라밀의 처음은 환희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환희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가 순환 확장되는 것이죠.
이건 기독교를 봐도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시작은 복음을 듣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이죠.
뭐 좋은게 있어야 다음 단계인 지계와 인욕이란 참는 과정을 거치죠.
5. 근본과 말단, 그리고 경(敬)의 결론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은 끝과 시작이 있으니 먼저 해야할 것과 나중에 해야 할 것을 안다면 도에 가까울 것이다 라고 되어 있는데 사실 여기다가 무슨 말을 더 해봐야 사족이 됩니다.
만약에 이와 같이 여러분들이 살 수 있다면 공무원이 되지 않아도 대기업의 정규직에 입사하지 않아도 여러분의 삶은 위태로워지지 않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이렇게 나오죠. 그런데 바로 이 내용 때문에도 성학을 하는 사람들은 조선시대에 권력을 잡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욕망의 확대와 심화와도 같은 궤적입니다.
그래서 수신을 자신을 꾸미는 것으로 제가를 일가를 이루는 것으로 치국은 나라를 지배하는 것으로 평천하는 온 세상을 좌지우지 하는 것으로 이렇게 “GREED IS GOOD 탐욕은 좋은 것이다.” 가 되어 당쟁을 일삼다가 망했죠.
최종 결론: 깨어있음과 무지의 구름
경은 곧 깨어있음이고 깨어있음은 오온을 내려놓음으로써 얻을 수 있고 내려 놓는 방법 중에 대표적인 것은 오직 모를 뿐으로 해서 카톨릭이 표현을 빌리면 무지의 구름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간단하게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으로 대학도의 리뷰를 마치겠습니다.
권근(權近, 1352~1409):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입학도설(入學圖說)》을 통해 성리학의 복잡한 체계를 도표로 정리하여 초학자들의 이해를 도왔음.
삼강령(三綱領): 《대학》의 핵심 강령인 명명덕(明明德), 신민(新民), 지어지선(止於至善)을 의미함.
지어지선(止於至善): ‘지극한 선에 머무른다’는 뜻으로, 단순히 도덕적 완성이 아니라 사태의 가장 적절한 지점(Middle Way)을 찾는 지혜를 포함함.
회광반조(廻光返照): 빛을 돌이켜 거꾸로 비춘다는 뜻으로, 외부로 향하는 시선을 자기 내부의 본성으로 돌리는 수행법.
무지의 구름 (The Cloud of Unknowing): 14세기 영국 미상의 저자가 쓴 기독교 신비주의 서적의 제목으로, 지성적 이해를 넘어선 신과의 합일을 강조함. 본문의 ‘오직 모를 뿐’과 일맥상통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