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학십도 인설도 리뷰

성학십도 제7도 인설도 리뷰: 인(仁)의 개념과 주자의 시각

성학십도의 7번째 그림인 인설도의 리뷰를 시작하겠습니다.

인설도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가 글과 그림을 모두 만들었습니다.

인이란 공자 사상의 핵심으로 쉽게 말하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마음이 인이고 사람도 이것을 이어받아서 자신의 마음으로 삼습니다.

즉 인은 생명을 낳는 소중한 마음이기에 모든 것에 두루 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에게는 네가지의 덕이 있는데 바로 인의예지입니다. 그 가운데에 인은 나머지를 모두 포괄하는 가장 중요한 덕이며 인의 발현이 곧 사랑의 실현입니다.

이렇게 소개글을 시작하고 있는데요. 이미 여러번 한 이야기지요.

당연한 것이겠지만 인이 천지 만물을 생성하는 마음이 아니라 천지가 만물을 생성 하는 마음을 인이라는 단어로 표현을 하는 것이죠.

이것을 다르게 불러도 아무 지장이 없지만 인간의 4 덕 중에 인으로 다시 말했을 때는 인간으로서의 근본을 말하게 됩니다.

우리가 몰라 해서 알게 되는 그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실제로 무엇인지 알게 되면 쉽게 설명한 말들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를 말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서(恕)’의 실상과 당위성의 함정: 왜 우리는 인생 루저가 되는가

이 인설도에서 꼭 말하고 싶은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인의 실천은 효제와 서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얘기했을 때 서 란 남이 원하지 않는 일을 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이 원하지 않는 일을 시키지 않는 것은 반이죠.

나머지 반은 남이 원하지 않아도 시키죠. 이런 공부들의 문제가 뭐냐면 일단은 그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당위성을 막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들을 가지고 충실하게 인생의 적용했을 때 세상에 단단히 뿌리내린 그런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게 아니라 이중인격자가 되거나 아니면 인생 루저로 만들어 버리는 거죠.

한쪽 눈을 멀게 만들고 한쪽 귀을 멀게 만들고 한쪽 발을 부러뜨리고 한쪽 다리도 부러뜨린 채로 살아가게 하는 거죠.

이러면 당연히 정상적으로 살아 갈 수가 없죠. 자기 스스로를 기만하든가 아니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무능한 사람이 되거나 둘 중에 하나가 됩니다.

이런 식으로는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가 없게 되죠. 남이 원하지 않아도 시킨다는 것을 따로 예를 들어서 말할 만큼 그런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죠.

왜냐면 너무 많은 경우가 있으니까요.

실제 예로 하나만 들어보면 유튜브 동영상에 이래라 저래라 의 명령조로 제목을 짓는 것을 보면 한 번은 돌이켜 봐야 되요.

그게 최선이였나 너는 누가 이래라 저래라 했을 때 좋아한 적이 얼마나 되었는지 먼저 생각해 봐야 하죠.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그렇고, 직장에서도 그렇고 이 말을 쓴 퇴계로 그랬을 거고 이 주자학의 원류죠.

주자학은 주자가 주인공이니까요. 주자도 누가 이래라 저래라 라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중도와 정견: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공부

그래서 늘 말씀드리지만 중도라는 것은 실상을 바로 보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죠.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또 누구도 실상을 바로보고 있다고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로 지금 이 견해로부터 출발하여 한발 한발 걸어 나가는 것이죠.

이게 팔정도이고 정견인 것이고 이 앞에 오는 정 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방향성을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이상 다른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담이지만 저는 석가모니가 뭐라고 했는지 별로 궁금하지 않아요.

그래서 초기 불교라는 사기질같은 것도 별로 현혹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저를 불안하게 만들 수 없어요. 왜냐하면 이상한 얘기로 현혹시켜 봐야 사람이란게 너무 뻔하거든요.

그래서 현혹되지 않고 불안하지 않습니다.

또 보면은 이렇게 세상에는 소승불교 라는 말이 있고 대승불교라는 말이 있고 뭐 이러지만 사실은 있는거라곤 그냥 불교뿐이죠.

석가모니로부터 출발한 것들이 하나의 문화를 이루고 정신적인 발전을 이루면서 한 2500년간 꾸준히 사람들 사이에 퍼져 왔죠.

그래서 사실은 그냥 불교만 있는 겁니다. 그 중에 지 잘났다고 뭐 이렇게 앞에서 하나씩 붙이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仁)의 본체와 작용: 참나와 신성의 다른 이름

다음으로 대체로 인이라고 하는 도는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마음으로 만물에 부여되어 그 속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정이 겉으로 드러나기 전에는 이 본체가 이미 갖추어져 있고 정이 이미 겉으로 드러나면 그 작용은 끝이 없게 됩니다.

진실로 이것을 몸소 깨달아 보전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선의 근원과 행실의 근본이 모두 여기에 있게 됩니다.

이것이 공문의 가르침이 반드시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을 찾는 일에 무엇보다도 앞서 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말하는데 이것을 참나 나 신성으로 바꿔불러도 하나도 어색하지가 않죠.

그래서 근본으로의 인을 말할 때와 인간의 사덕 중의 하나인 인은 같으면서도 다른 것입니다.

다음으로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정자의 제자 중에는 만물이 나와 더불어 하나다 라는 말을 인의 본체로 삼는 사람도 있고 마음에 지각이 있는 것을 인으로 해석해서 말하는 사람도있는데 모두 잘못된 것입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주자가 대답하였습니다.

만물과 내가 하나라고 하는 사람은 인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이것이 인의 본체가 되는 참된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마음에 지각이 있는 것으로 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인이 지를 포함하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것이 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실제 이유는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인이 사실은 참나 나 신성, 불성과 같은 개념이라는 것과 겨우 공적영지나 허령지각 하나 알았다고 견성했다고 나는 다 봤다고 말하는 것이 이제 얼마나 멍청한 얘기인지 알고도 남으리라고 봅니다.

참나, 인, 신성, 불성이 사실상 다 같은 개념이기 때문에 통합해서 말하자면 참나의 특성들을 우리가 보긴 하지만 그건 일부일 뿐이고 사실은 그 자체가 불가지 라서 다 안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래서 억지로 붙인 이름들 입니다.

일찍이 제가 존경하는 광덕스님도 그렇게 말씀을 하셨고 제가 공부한 결과도 틀림없이 그렇습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실은 참나에 뿌리내린 한송이 꽃이고 신성의 무수한 다른 표현들 중에 하나입니다.


변화하는 공부: 아공에서 법공으로의 여정

따라서 결국 공부는 나만 변하지 않습니다. 나도 변하고 너도 변하고 환경도 변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아공에서 법공으로 가면 이 순서를 다른 종교로 치면 강령, 대강령, 감응, 강화지교 같은 형태로 일련의 진행이 있게 됩니다.

이렇게 뜻하지 않게 일어나는 이러한 일들이 자신에게 변함없는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고 또 뜻대로 남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일대종사의 지위에 있을 것입니다.

뭐 대강 말을 하면 이렇습니다

이렇게 리뷰를 마치고 다음에 시간을 만들어서 꼭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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