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통성정도의 리뷰
퇴계 이황이 보완한 마음의 지도
심통성정도의 리뷰를 시작하겠습니다.
심통성정도는 글과 그림 중에서 상도를 정복심이 만든 것인데 퇴계가 중도와 하도를 보완한 것입니다.
대학도에 나왔던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것에 성리학적 해설인 셈인데 그림도 복잡하고 내용도 꽤 어렵다고 합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마음과 본성, 감정입니다. 마음이란 인간의 몸을 움직이는 주인입니다.
그리고 마음은 본성과 감정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들을 통제하고 포섭하는 역할을 함께 한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잘 수양하여 바르게 유지하면 자신의 본성을 알 수 있고 감정을 조절하여 학문의 방법을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틀’과 언어의 주술
신령스러운 기운과 교화의 가능성
인간이란 사물과 달리 가장 신령스러운 기운을 받고 태어난 존재이기에 마음을 바르게 하면 자연스럽게 본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한가지를 되짚어 생각해보면 사실과는 별개로 인간이 가장 신령스러운 기운을 받고 태어난 존재라고 긍정해야 비로소 인간이 교화가 가능한 존재가 되는 거죠.
인간이 짐승이야 이러면 교화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일단 설득력을 잃어버리겠죠.
그래서 언어는 곧 주술이기도 합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하나의 주술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안으로는 본성을 밝히고 밖으로는 인간으로서의 걸맞는 틀을 제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일종의 줄탁동시이기도 합니다.
이 밖에서 잡아주는 틀이 익명과 분산으로 사라졌을 때 나오는 것이 일베니 워마드하는 것들이죠.
전에 하태경의원이 일베는 좀 찌질한 사람들이 모인 것이고 워마드는 더 나쁘다고 했던 것이 기억나는데 저는 워마드 부모가 일베라고 생각하고요.
일베가 없어지지 않는 한 워마드도 영원할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은 천지의 문이자 도로이다
성학과 불교적 시각의 융합
제 기억으로는 “이 심통성정도는 퇴계 학문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이다.” 라는 말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또 구한말에 3대의 이인이라 불린 사람 중에 한 명인 강증산 선생에 따르면 “마음은 천지의 귀와 신들이 드나드는 기관이고 문이고 도로 입니다.” 라고 말하는데 퇴계는 마음이 본성과 감정을 포괄하면서 통제한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으면 성이 되고 마음이 사물과 만나여 통하게 되면 정이 된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죠.
근데 이 성을 잘 보면 보통 2가지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대략적으로 하나는 인간으로서 근본이고 다른 하나는 더 깊게 생명으로서 근본을 말합니다.
그래서 불가쪽의 공부를 하고 들어가면 생명으로서의 근본을 더 많이 건드리게 되지만여기 유학이나 성리학, 이 성학에서 말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근본이 더 많이 부각이 됩니다.
그래서 양자에는 조금의 차이가 있습니다만 결국 공부를 하다보면 처음에는 인간으로서 근본을 따지게 되고 더 들어가면 결국 생명으로서의 근본을 따지게 됩니다.
이건 아주 당연한 것이고요. 그리고 이 마음의 상태에 따라 성과 정, 체와 용의 단계에 따라 분류한다.
뭐 이런 얘기가 있는데 이런 것들이 불교에서 보는 시각들이죠. 불교가 유교에게 영향을 준 것입니다.
사단칠정론과 성선설에 대한 재사유
‘선(善)’이 가진 ‘좋다’와 ‘옳다’의 본질
사실 심통성정도는 제목이 이미 모든 것을 다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음에 성과 정이 통하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서 한번 부연 설명을 곁들이면 이게 바로 유명한 사단 칠정론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선설을 말하는 것이죠. 사단 칠정론을 말하는 것은”인간이란 본래 선하다.” 이렇게 성선설을 말하는데 저는 이 성선설을 좀 다시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전에 이 선이라는 글자가 “좋다 라는 의미와 옳다 란 의미가 있다.” 라고 했습니다.
공자는 어질다 라는 의미로 이 선을 많이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었다면 맹자는 옳다 라는 의미를 많이 두었다고 해요.
그래서 보통 바둑에서 선악을 모른다 하면 “이익인지 손해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라는 말로 쓰입니다.
또한 우리가 자주 듣는 다다익선 이라는 말이 있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선은 분명히 좋다 라는 의미인데 옳은 것을 말한다는 것은 왜 그런가 하고 생각을 하면 아주 간단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좋다 라는 것은 좋다 라고 느끼고 생각되는 무수한 많은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줄을 잘 서 있는 모습과 아비규환의 혼돈을 보여주면 보통 줄을 잘 서있는 쪽을 좋다 라고 느낍니다.
이렇게 사람이 무작정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을 “좋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질서와 조화 역시 좋다 라고 하고 우리가 보통 말하는 아름다운 미덕들도 역시 우리가 좋다 라고 느낍니다.
또 이런 질서와 조화 만이 아니라 금요일 토요일 밤의 나이트 요즘엔 클럽이죠.
광란의 무질서도 또한 인간은 좋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의 “좋다” 가 있지만 중요한 건 우리 안에 이 좋다 라고 여기는 부분이 이렇게 질서와 조화에도 좋다고 느끼고 개인의 이득 만이 아니라 공익에도 “좋다” 라고 느끼기 때문에 선이라는 글자는 “옳다” 라는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겁니다.
빈약한 사유를 넘어 삶에 도움을 주는 가르침으로
통속적 잡담의 배제와 중용의 미덕
실제로 공부를 하는 입장에서 성이 선 이란 말은 금방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이 선이 무조건적인 자기희생을 말하는 거 같은 그런 종류의 유약한 착함이나 또 어리석고 무능력을 다른 표현으로 덮어 버리는 그런 것을 말하는 내용이 결코 아니죠.
그래서 이런 것들에 대한 구분이 없기 때문에 왜 나는 착하게 살았는데 이렇게 힘들어 지느냐?
뭐 이런 얘기를 하게 되는 것도 한편으론 이해가 가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생각이 빈약하고 좀 사유가 빈약한 거에요.
근데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것들의 앎은 보통 통속적이고 사극에서 시장이나 혹은 빨래터 뭐 이런 저자거리에서 나누는 그런 대화의 수준으로만 흘러가면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사람이 점점 더 어두워지지 밝아지는 경우는 없는 것 같아요.
한번 더 강조하지만 이건 제 인생을 걸고 말해도 좋은데 잡담식으로 우리가 흔히 대화를 사교의 땔감으로 쓰는 그런 대화를 통해서는 보통 지혜가 밝아지는 경우가 없고 오히려 더 생각이 빈곤해지고 사상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오염이 됩니다.
그래서 공부는 그런 식으로 하면 안되는거 같아요.
뭔가 하나를 해도 좀 깊게 생각을 해보고 판단을 해야지 대화를 통해서 뭔가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저는 권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오히려 성학의 인과 예 보다 이런 말이 쉽게 더 이해가 갈 것 같아요.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아주 쉬운 표현이 있죠. 그래서 이렇게 사람이 절제와 공존, 조화를 추구하죠.
분명히 인간은 나에게 좋은 것을 포기하고 살 수는 없지만 공존과 조화를 추구할 수 있는 힘이 역시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도 분명한 팩트입니다.
그런게 예 라고 하고 요새는 매너라고 간단하게 표현을 하죠. 바로 우리가 그런 모습을 좋다고 느끼고 또 아름답다고 느끼고 진실되게 느끼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우리는 “좋다” 라고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좋다” 라고 느끼는 그 개별적인 것들의 조화가 중용이 아닌가 하는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 뭐 책에는 여러가지 내용들이 다 있고 이것들을 세세하게 리뷰 할 생각은 사실 없습니다.
이게 제가 무슨 강의를 하는 건 아니니까요.
보통 사단 칠정론이라는게 도덕적인 분류 라든가 결국엔 인간이 왜 착하게 살아야 되느냐? 에 대한 당위성을 제공한다든가 이런거는 저는 좀 별로에요.
진짜 옛날에 공무원 윤리시험같은 것만을 위해서 있는 학문이라면 사실 이 공부가 가치가 있는 일은 안 될 겁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실제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그렇게 이론적이고 막 심오한 얘기를 늘어놓는 경우는 별로 도움되는 경우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보통 아주 난해하고 심오하게 보이는 것도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출발은 사람의 삶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소박하고 담백한 맛이 있는 그런 가르침들이죠.
그래서 현실에서도 쓸데없이 말만 많고 복잡한 이야기를 늘어 놓는 사람들은 일단 제끼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걸로 심통성정도의 리뷰를 마치겠습니다.